노후가 두려운 이유는 치매가 가장 크다. 일상생활이 어려워지고 가족을 떠나야 할 수도 있어서다. 무엇보다 인간의 존엄성이 위협받는다.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예술은 치매를 어떻게 볼까. 제주 서귀포시 포도뮤지엄에서 20일 개막한 기획전 ‘어쩌면 아름다운 날들’은 이런 질문을 던진다. 상실과 망각의 세계를 회화 사진 조각 음악 등 다양한 장르로 표현하면서다. 전시회에는 알란 벨처, 루이스 부르주아, 셰릴 세인트 온지, 로버트 테리엔, 더 케어테이커&이반 실, 시오타 치하루, 정연두, 민예은 등 국내외 작가 10팀이 출품했다.
어느 날 온지는 나른한 햇살이 어머니를 비추는 모습에서 아름다움을 발견했다. 이때부터 어머니를 가볍고도 명랑하게 촬영했다. 조류 관찰자였던 모친은 치매에 걸린 뒤에도 말총으로 새 둥지를 만들며 놀았다. 온지는 “어머니는 사진을 찍는 순간만큼은 해맑게 머리를 매만지고 옷매무새를 다듬곤 했다”고 말했다.
프랑스 출신의 세계적 조각가 루이스 부르주아는 스페인 독감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6점의 ‘밀실’ 연작으로 기렸다. 국내에 처음 소개된 ‘밀실1’(1991)에는 작가의 유년기 기억이 담겼다. 페인트가 벗겨진 허름한 문틈 사이로 앙상한 침상과 의료 도구들이 보이는데 장기간 병상에 누워 있었던 어머니를 떠올리는 작품이다. 낡은 매트리스에는 ‘I need my memories: they are my documents(나에겐 기억이 필요해: 그것은 나의 기록들이다)’라는 문구가 새겨졌다. 부르주아는 성장기에 아버지와 가정교사의 불륜을 목격한 까닭에 아버지를 향한 적대감과 어머니에 대한 연민을 느끼며 자랐다.
원형 전시장 벽에는 이반 실의 회화 연작이 걸렸다. 11점의 그림은 음악의 각 트랙과 조응한다. 인간의 얼굴이나 조각을 연상케 하는 형태인데, 그 모습은 시간이 지날수록 추상적으로 왜곡된다. 결국 연작 마무리 부분에 극단적으로 단순화된 직선에 이른다. 지난했던 소음 뒤에 잠시나마 과거의 아름다운 선율이 선명해지고, 이내 모든 것이 끝나는 인생을 암시한다.
포도뮤지엄과 조경업체 수무 등의 공동작업으로 완성된 작품이다. 8채널 영상으로 프로젝션 매핑 기술이 도입됐다. 지난해 포도뮤지엄에서 진행한 ‘추억의 비디오’ 공모전에 참여한 관객들의 실제 비디오 영상을 활용했다. 배롱나무는 김희영 포도뮤지엄 총괄디렉터의 집 앞을 지켜온 나무다. 김 총괄디렉터는 “이번 전시는 인지 저하증을 처참한 질병이 아니라 생의 자연스러운 과정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마련했다”고 말했다. 국내 치매 인구는 100만 명에 달하고 65세 이상 노인 10명 중 1명은 치매 환자로 분류된다. 전시는 내년 3월 20일까지.
서귀포=안시욱 기자 siook95@hankyu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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